이재정 목사(복된교회)

군자란 귀물스러운 싹이 3자 세 개를 겹쳐 놓은 듯 탐스럽게 피어오르는 봄볕입니다.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신 새가족 심방 날짜가 3월 3일 오후 3시입니다. 그 생기를 응원하는 봄비가 매끄럽게 지난 춘삼월의 심방길은 공기가 싱그럽습니다. 내가 자란 마을처럼 햇볕 마주한 시골집이 정갈하고 정겹습니다. 꽃 시샘하는 봄바람이 심술궂은 날이지만 집 자리가 아늑하여 바람이 멎은 듯 따사롭습니다. 길에서 마당으로 들어서는 짧은 순간에 시골 고향 집이 그리웠습니다. 그 마당을 서성이시던 어머니도 잠시 뵈었구요. 한겨울 넘어 봄이 다 되도록 싱싱하게 고구마를 보관하신 걸 보니 안주인 살림 내공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에 쓰인 대로 복을 빌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이 계신 걸 믿었더랍니다. 교회를 잠시 드나든 적이 있지만 큰 믿음을 갖지는 못하셨다지요. 남매 자녀 길러내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세월로 자신을 단조하여 살아 70에 다다랐습니다. 거울에 비친 고되게 살아 온 세월의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나이의 남들보다 더 늙어 보인다는 푸념도 스스럼없이 쏟아놓으십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다행히 톤 높은 목소리는 맑고 청량합니다. 씩씩한 기운이 역력합니다. 그런 분을 만나면 내가 속으로 지어 부르는 별호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면 ‘똑순이’ 연세가 지긋하면 ‘여장부’입니다. 이분은 후자입니다.

필시 목사 심방길 대접일 테지요?. 기름 안 아끼고 보일러를 넉넉히 열어 따끈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잠시 시간을 깔고 앉으니 살아온 70년 세월이 실타래처럼 풀립니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와서 어린 시동생들 건사해 성가(成家) 시키고, 남매 자녀를 낳아 길렀습니다. 돈이야 땅에서 말고는 나올 곳이 없으니 열심히 땅을 일구신 일생입니다. 단순히 씨앗을 심어 거두는 농사가 아니라 그 땅에 비닐을 덮고 시설 재배도 했습니다. 그거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농촌이라도 농한기 없이 자신을 닦달하는 노작입니다. 그렇게 거둔 걸 돈으로 바꾸는 일에도 녹록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직접 가판을 열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그 땀으로 만든 돈을 두 자녀 학업 뒷바라지에 쏟아부었습니다. ‘자식 농사’지요. 다행히 두 자녀 모두 학업에 명민했습니다. 부모님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아드님은 의사가 되고 따님은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평생에 이룬 업적으로 자랑스러울 만하건만 그냥 대수롭지 않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보니 늙었어요” 평상 언어지만 마음에 착 가라앉는 말씀입니다. 자주 거울 속을 들여다보시는 모양입니다. 아쉬운 세월이야 거울 뒤편으로 숨어 버린 걸 어쩌겠어요. 쉬 포기하지만, 마음에는 우울이 들어섭니다. 그러다가도 정신이 번쩍 드신대요. 아드님이 신경정신과 의사인데 엄마가 정신줄 놓으면 어쩌나 싶더라지요. 어머니는 영원합니다. 그 말이 더 와닿는 것은 나도 공식적으로 국가의 부양 의무 대상이 되어 보건소에서 무료로 예방 접종해 준다는 연락을 받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교회를 나가야겠다 싶더구먼요. 내 인생도 있으니까요” 그런 동기로 복된 교회 발을 들이셨습니다. 우리 교회 새가족 팀이 따듯하게 반겨 주셔서 쉬 적응하셨습니다. 그냥 예배당에 가서 예배만 드리는 건 믿음 들기 어려우니 어떻게 무얼 믿는지 배워보아야겠다 싶어서 새가족 공부에 참여하셨습니다. 새가족 공부 인도하시는 유은상 장로님이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잘 가르쳐 주신답니다. 귀한 일이지요. 나는 심방길에 그 주도적인 결단을 충분히 격려해 드렸습니다.

최근 아드님이 새로 병원을 여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믿음은 없어도 엄마의 기도가 제일인 건 알아요. 그래서 기도로 도와줘야지요” 마음을 안으로 오므려 기도를 다짐합니다. 늙었어도 젊었어도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인 것이 장엄하게 와 닿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다 어느 날 문득 늙었다는 생각이 스며들어 종종 우울해진답니다. 다들 그러시지요? 늙는 줄 모르고 허겁지겁 살다가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우울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고 더러는 성형외과도 드나드는 모양입니다. 돈 들인 만큼은 세월의 흔적을 지우기도 하는 모양이어서 좋아 보입니다. 좋은 계절 3월에 바로 지금 그 ‘어느 날’을 살고 계신 평범한 위인들 모두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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