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어느 날, 이른 새벽, 어둠과 밝음의 따악 중간 즈음, 창문을 열면 습기 말라가는 나뭇잎 향이 다가온다. 갈 길 바쁜 寒蟬의 구슬픈 소리와 함께 낯선 풀벌레 소리가 함께 할 때 그렇게 무념이 잠시 서 있는 순간, 갑자기 이게 아닌데, 홀연 무엇인가를 깨닫는 시간, 어제보다 좀 더, 그제보다 조금 더, 보이는 것마다 그림자를 달고 있거나 혹은 선명한 그림자가 보이면 그림자라는 존재에 유심하게 되고ㅡ그래서 구월을 현월玄月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ㅡ마치 그들의 친근한 벗이라도 되듯 悲나 哀를 떠올리는데 나는 그것을 가을의 포획술이라 본다.

가을이 되면 ‘우륵’의 애이불비가 생각난다. 우륵은 가야국 성열현(省熱縣) 사람인데 나라가 망한 뒤 자신의 나라를 침범한 진흥왕을 찾아간다. 가야금을 매고 가서 진흥왕에게 살려주세요. 당신 발아래 있게 해주세요. 말한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라도 음악을 하기 위해 살아야 하나를 하마 천 번쯤 만 번쯤 되뇌지 않았을까, 진흥왕은 우륵을 현재의 충주인 국원(國原)에 머물러 살게 했다. 그리고 주(注知), 계고(階古), 만덕(萬德) 이란 세 젊은이를 보내 가야금을 배우도록 했다. 우륵은 이 세 명의 젊은이를 받아들여 가야금 11곡을 모두 전수하였는데 그들 젊은 제자들은 11곡을 번거롭고 음탕하다고 여겼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나라를 잃어버린 굴욕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자의 한과 슬픔이 배어있는 음악이었으니, 그들은 스승의 곡을 다시 5곡으로 개작을 해버렸다. 이들이 연주하는 가야금 5곡을 듣고 난 뒤에 우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즐거우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애련하면서도 슬프지 아니하다樂而不流 哀而不悲.” 사람들은 추측한다. 우륵은 제자들의 음악에서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느꼈을 거라고, 그래서 그 음악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그에게 목숨과 같은 음악이 그가 가르친 제자들에 의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음악이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애련하지만 슬프지 아니한, ‘哀而不悲’로 현현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내게도 아주 쓸쓸한 기억 하나.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형제들이 모두 본가에 모였다. 아프셨던 아버지가 집으로 가시고 싶다고 해서 퇴원을 하신 후였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아버지는 안방에 누워 계셨고 우리는 거실에서 무슨 이야긴가를 하다가 왁자하니 웃었다. 우리 모두 웃다가 아버지 생각이 나서 저절로 숨을 죽였다. 그렇다고 이미 아버지 귀로 들어간 웃음소리조차 회수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그때, 아버지는 얼마나 쓸쓸하셨을까, 이미 다른 생을 살고 있구나. 나 떠나도 너희들은 그렇게 웃으면서 살겠지. 그래야 하겠지. 아, 몸의 아픔보다 그 쓸쓸함이 더 아프지 않았을까. 아버지를 쓸쓸하게 만든 의도치 않았던 불효가 이상하게 잊히지 않는다. 생의 쓸쓸함을 보여주는 명료한 한 컷이라고나 할까, 딱 이무렵이다. 가을의 초입. 아버지도 세상에 계시지 않고 친정 본가도 이미 남의 집이 되었다. 그래도 뜨락의 무화과 열매는 익어가겠지. 지붕 위 제암산 위로 쪽빛 하늘은 더 푸르러질 테고,

명민하고 재기 어린 글을 쓰는 시인이 신천지가 문제가 아니고 종교 자체가 문제라고 쓴 글을 읽었다. 종교를 문제라고 단언하는 사람의 속내를 짐작 못 하는 것은 아니나 서늘한 것 역시 사실이다. 드물게 귀로 향기를 들을 수도 있고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도 있겠지만 눈이 있어야 세상을 보지 않겠는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유해지는 경향이 많아졌다. 틀린 게 아니라 다름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타인에 대해 겸손하나 결기 없는 모습이기도 하며 세상의 배면을 바라보는 일일 수도 있다. 기실 무엇을 단호하게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계절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구십 넘은 시인이 이제 시를 쓰지 않고 헐렁하게 살겠다는 글을 읽었다. 귀가 얇아선지 그이의 헐렁함이 가슴속으로 수욱 들어온다. 그래 맞아, 헐렁하게! 애이불비인 이 가을을 나도 헐렁하게 살아보자. 一葉知秋. 이파리 하나로 가을이 오질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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