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으로 내가 좋아하는 우아한 삶의 양태를 나타내주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온조왕이 지은 궁궐을 표현한 말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고 검박한 미의 양식을 지칭하게 되었다. 검소함부터 화려함까지 두루 섭렵하되 누추함과 사치는 경계하라는 말일 것이다.

당연히 궁궐 이야기만은 아니다. 궁궐을 사람으로 바꾸면 더 합당하고 고졸한 미가 나온다. 겉은 소박하나 그 내실은 당당하고 아름다운 외양과 함께 그 내면은 따뜻하게(사치는 왠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단어이다)

빌립보서의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자세히 보면 바울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족한 것을 배우니 비천도 풍부도 별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도 풍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지닌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통계란 어떤 사실의 경험치를 모아 요약된 수치로 이야기할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한다. 물론 서로 좋아지기 위한 담론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 신문기사에서 서독인들은 29평 아파트에 살고 동독인들은 24평에 산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런 통계를 왜 내는 걸까, 굳이 이런 경제적 차이에 기반을 둔 프레임을 씌운다면 동서독인들 모두에게 유익할까? 그 차이를 알아서 도움이 될까, 작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에게 29평이 평균이야? 나는 왜 평균에 못 미치지? 필요 없는 생각을 하게 하지 않을까,

차이는 세상 만물에 가득하다. 하다못해 한 엄마 배 속에서 자라는 언니와 나를 봐도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약했고 나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했다. 약한 언니를 위해 사준 원기소를 언니는 그렇게 먹기 싫어했는데 건강한 나는 원기소가 그렇게 맛났다. 한 부모 아래서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고 비슷하게 배워도 삶의 갈래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다르다는 것, 차이 난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70억 인류의 얼굴을 생각해보라. 창조의 비밀과 섭리가 거기 포진하고 있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예배 앞에 대면 비대면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 예배는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을 차리는, 시끄럽게 살다가 문득 고요해지는, 나를 잊고 살다가 나를 찾게 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영혼과 세상 모든 만물 속에 존재하시는 그분과의 만남인데 거기에 대면 비대면이라니,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소스라치듯 든 생각, 혹시 나는 그분과 내내 대면 예배를 한다면서 비대면 예배를 하고 있지 않았나,

깊은 밤 사람 드문 산책길에 달은 더할 나위 없는 근사한 친구다. 달을 보며 걷는다. 달도 나를 보고 있을까? 상관없다. 나도 기실 그를 보며 걷지만 무수한 다른 생각을 한다. 아니 오히려 그를 바라보는 것은 그 아닌 생각을 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달을 보는 위장? 속에서 더 선명한 나와 만나는 것, 라캉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매혹당하고 그 이미지에 따라 자아를 형성한다고 했다. 기기 시작하는 아이들 앞에 거울을 놓아주면 자신과 한참 논다. 거울 속 자신은 타자이면서 자신이다. 저 달 역시 나의 거울이다. 그를 보지만 그를 생각하는 게 아닌 자유로움. 그리고 다시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 어느새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너의 삶 역시 홀로 가는 길이란 것을 가르치고 있다. 가끔 내게 삶을 벗어나라고 속삭이며 다른 길이 보일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인생을 달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윤오영의 가을 가득한 <달밤>이 생각났다. 달빛 아래 대청에서 달을 바라보던 두 남자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그러나 그의 짧은 수필은 검이불루한 글이고 그 글에서는 화이불치한 삶이 보였다. 가을밤에는 그 어느 때보다 달을 보며 걸을 일이다.

위 영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