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정 목사(복된교회)

타고난 성정이 부지런한 까닭이지만 새벽예배를 마치면 뭐든 합니다. 젊었을 때는 주로 책을 읽었지요. 최근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야트막한 산을 오릅니다. 그야말로 야산 중의 야산이지만 가을이 숨어드는 숲길을 뛰는 일상은 다양한 만족감을 줍니다. 두어 날은 글쎄 알밤을 주웠지 뭐예요.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그 실한 결실을 집어 드는 기쁨이 가을 선물입니다. 행여 더 있을까 싶어 밤나무 아래를 한참 서성이면서도 공부가 따릅니다. 밤송이째 떨어진 건 대부분 벌레 먹은 겁니다. 실한 알밤은 밤송이를 쏙 빠져나와 그야말로 알밤으로 나뒹굽니다. 잘 자란 자녀, 잘 자란 성도가 내실 있게 독립하는 모습으로 읽힙니다. 온몸이 뒤집힐 만큼 쩍 벌어져 알밤 다 떨구고 뒤늦게 떨어진 밤송이는 역할 잘 감당한 교회이거나 부모님처럼 장엄해 보입니다.

사는 모습들이 다양합니다. 부자로도 살고 가난하게도 삽니다. 왁자하게 더불어 살기도 하고 외로이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농사짓는 분도, 장사로 사시는 분도 있고, 월급 받아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행복한 일들이 많지만 더러는 절벽 같은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덜컥 질병에 붙들리는 때도 있습니다. 잘 나으면 하나의 과정이지만 오랜 병원 생활로 이어지면 난관입니다. 경제적 손실이 심하기는 하지만 다행히 이 나라 의료 체계는 환자를 파산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육체적 기능 저하를 따라 마음도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이 막연한 대상을 향해 분노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대형 병원들마다 의사들이 없으니 치료에 조급한 건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시간도 무질서해지고, 삶의 모든 기반이 흔들립니다. 한계상황이랄까요?. 그럴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결정적인 자산입니다.

최근에 잘 낫지 않는 질병으로 진단받고, 치료의 다음 단계로 올라서야 하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더 치밀한 검사를 받아야 하는 과정이 그 질병만큼이나 복잡합니다. 다른 도리는 달리 챙기기로 하고 우선 그분들과 병원 복도에 서서 함께 나눈 기도가 절실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합니다.

병원을 드나들 때 부부가 늘 함께 다닙니다. 시골에서 평생 농사일로 늙어오신 분들이니 맑고 바르지만, 큰 병원에 드나드는 절차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서툴지만 트럭을 운전할 수 있으니 ‘내비게이션’을 따라 조심조심 다닙니다. 한두 시간 기다리는 건 일상인 병원 진료, ‘바코드’ 인식으로 치러야 하는 진료 의뢰, 신용카드를 들이밀고 자동 수납 장치와 만나야 하는 절차는 난제 중의 난제입니다. 매우 공식적인 언어로만 소통하는 병원 직원들은 아예 공포의 대상입니다. 쉬 알아 못 듣는 환자가 답답한 건 오히려 병원 직원들입니다. 그래서 동행하여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 끼어들게 됩니다. 그런 일과는 사람을 흠뻑 지치게 합니다. 빠듯한 일과 중에 잠시 잠시 짬을 내야 할 수 있는 일이니 내 시간도 늘 조급합니다.

한나절 그 전쟁을 치르고 병원 문을 나설 때는 모두가 파김치입니다.

“뭘 두 분이 다 오셔서 그 고생을 하셔요. 환자만 오시면 되지”

한 분이라도 그 고행에서 해방 시켜 드리려고 그리 권했지요. 병원 행보에 부인의 역할은 괜한 수고로 보였거든요. 별 말수가 없는 부인은 화들짝 놀랍니다.
“아니에요. 같이 다녀야 돼요. 이 양반은 나 없으면 길 잘못 찾아요”

“정말이에요?”

믿기지 않아서 되물었습니다. 남편의 대답이 의외입니다.
“그러게, 저 사람이 옆에 타서 길 찾을 때, 상의적으로 하면 낫지”

주섬주섬 당신들 차에 오르는 시골 노인 부부의 심란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구부정한 모습이 초라해 보이다가 갑자기 “그래도 살아지는 법이지”라는 말이 떠오른 것입니다.

서로 완성도 높은 사람들이 밤송이에서 알밤 떨어지듯 옹골진 자아를 살아내는 삶에 가치가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더불어 어수룩한 속내를 합쳐 더불어 살아내는 모습도 결코 덜 익은 인생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고쳐먹습니다. 그게 부부라면 그게 그리 살라고 짝지어 주신 아버지 뜻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섰습니다. 가을 햇살이 더 영롱한 건 눈가의 이슬이 빚은 신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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