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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초의 전킨 선교사’ (40)군산 선교사 시절, 나의 아버지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07.14 16:30
  • 호수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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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 선교사(1865년 12월 13일~1908년 1월 2일)

지네에 대한 추억도 있다. 지네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독이 있다. 나는 물린 적은 없었다. 엄마가 가꾸는 밭에서 뱀을 밟을 뻔했다. 꼬리에는 작은 뿔 같은 것이 있는데 이 꼬리로 사람을 치고 사람의 피부에 박고 이것으로 공격한다고 하였다. 2피트 길이의 작은 뱀이 있다. 물렸을 때 물린 사람의 건강상태가 나쁘면, 사망하거나 염증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미국에 있는 지네는 5cm이다. 한국의 지네는 연필 한 개 만큼 길이가 길었다. 그리고 닭은 다른 곤충을 한꺼번에 먹어 버리지만 지네는 부리와 발톱으로 조각을 내서 먹었다. 궁멀 마을에 살았을 때, 아버지가 순회 설교하러 갔던 어느 날 밤, 엄마가 동생 윌리암이랑 자고 있는데 동생이 잠을 못자고 뒤척이길래 엄마가 일어나 성냥으로 불을 켜서 보니 침대에 큰 지네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윌리암을 불끈 안아서 다른 침대로 옮겨놓았다.

엄마는 촛불을 바닥에 떨어뜨려 불이 꺼져서 캄캄한데 손으로 더듬더듬 성냥을 찾아서 다시 촛불을 켜서 보니 지네가 윌리암이 누웠던 침대 자리가 따뜻하니까 그곳에 지네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지네를 잡아서 가위로 잘라서 죽였다고 한다. 지네는 다리가 많아서 가위로 잘라도 금방 죽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기어가서 몸부림치다가 죽었다. 나도 궁멀에서 지네한테 물렸었다. 그때 나는 그 지네가 신발끈인 줄 알았다.

 선교 시절, 생활품을 자유롭게 구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신발끈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남겨놨다. 그 당시 상점에서 신발끈을 살 수도 없었고 신발끈도 없어서 지푸라기로 신발을 묶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보관 해놓았다. 그래서 나는 비눗물이 담긴 대야에서 손을 넣어 신발끈을 찾으려고 손을 넣어 더듬거렸더니 지네가 손가락을 물었다. 즉시 동네 작은 진료소로 달려갔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치료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의사인지 의사 보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지네에게 물린 발을 불로 지졌다. 그 당시에는 의자가 매우 적었다.

 추억을 말하다 보니 신앙적인 부분을 빠뜨렸는데 우리가 매일 아침 가족 기도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가 순회 설교를 나가셨을 때는 엄마가 주관하였고 세 명의 한국 사람 도우미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도우미 엄마는 우리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였는데 우린 커서 더 이상 도우미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와 함께 살았다.

그 당시 우리가 먹는 야채 생산지인 밭에서 채소를 키우는 일을 하셨었는데,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한글로 된 성경을 읽고 기도도 한국말로 하였다. 우리들은 그때 즈음엔 한국말도 영어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노래를 잘해서 선교사들은 미국 음조로 한국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면 즉시 노래를 빠르게 잘 배웠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미국 찬양 곡조에 한국말을 붙여서 찬송을 불렀다. 주일날은 처음에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고 성도들도 없었고 단지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있었다.

언덕 아래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한 방울 줄로 이동분 하여 강단까지 줄을 치고 긴 커튼을 쳤다. 남녀부동석이라서 남자들은 여자를 볼 수 없도록 하였다. 우리 부모님은 이런 문화를 과격하게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고 한국 풍조 그대로 예배를 드렸다. 나중에는 남녀가 함께 앉기도 하고 함께 행동도 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산에 가서, 잘라온 소나무를 실에 꿴 튀밥으로 장식하여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촛불을 켜놓았다. 촛불을 켤 때 특히 불조심을 많이 했다. 예수님을 영접한 한국인들이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 왔다.

크리스마스 때, 쿠키를 만들어서 나눠줬는데, 한국 아이들이 자기 형제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크리스마스 트리도 보고, 쿠키를 먹곤 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쿠키가 부족하여 형제들 숫자에 맞춰 공정하게 나눠주면 싸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그 당시 한국 아이들은 한 입밖에 안 되는 쿠키라도 주면, 두 손으로 받아먹는 것을 보았다. 두 손으로 물건을 받는다는 것은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한국 아이들은 매우 예절에 밝아서 미국 아이들을 예의 바르게 대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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