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목사 |
“어이. 동무들 반동 예배당을 싹 다 불 질러 버리라우.” 그들은 예배당 지붕에 횃불을 던졌고, 불붙은 볏짚단을 예배실 안에 집어넣었다. 예배당을 포위한 채였다. 윤임례와 새벽 기도를 했던 둘째 며느리 조선환 집사가 연기와 불길을 견디지 못하고 예배당에서 뛰어나오자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들은 애당리를 돌며 예수 종자들 씨를 뿌리 뽑아 버리자며 동네를 뒤집고 다녔다. 김용은의 조카 김무곤, 김의곤, 김순곤이 죽었다. 김용채와 조선환 집사의 여덟 살 미만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재당숙 김정두와 김환두가 숨졌다. 재당숙모 양대안과 김염순, 팔촌 제주 오복순과 곤자 항렬의 조카 김길곤, 김택곤, 김우곤, 김오곤이 무참히 살해됐다.
예배당 불길은 정오가 다 돼서야 사그라졌다. 그 누구도 예배당 불을 끄려 하지 않았고 접근도 하지 않았다. 윤임례는 기도하는 모습으로 숨졌다. 불구덩이가 잦아지자 용은의 둘째 아들 성곤이 기적처럼 움직였다. 두꺼운 뒤주가 넘어져 죽창에 찔린 그의 몸을 보호하면서 기절 상태였다가 깨어난 것이다. 이웃이 그런 성곤을 거두었다. 그런데 퇴각한 줄 알았던 그들이 다시 마을에 나타나 성곤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이웃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자칫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해서였다. 성곤은 축 처져 그들의 손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그리고 개울에 다다랐을 때 엄마를 찾는 아이를 개울 옆 논바닥에 던졌다. “반동의 씨를 비트까지 꼭 데려갈 필요가 있어?” 성곤은 불길에서 살아났지만 또 그렇게 대창에 찔려 숨을 거두어야 했다.
그렇게 두암교회 교인과 용은의 친인척 등 스물세 명이 순교했다. 그들은 용은을 수괴라 일컬으며 머리카락 하나라도 보호하는 이들이 있으면 가차 없이 불 질러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들의 집요한 추적 끝에 용은은 밀고를 당해 애당리 남쪽 매봉산 기슭에 숨어 있다 체포되고 말았다.
“남조선 기독교 괴수를 드디어 잡았구나. 우리가 너를 잡지 못해 전북 도당으로부터 매일 자아비판을 해야 했지. 오늘 드디어 그 복수를 하게 됐다.” 정읍군당 간부가 용은을 포승줄에 묶어 매봉산을 내려가며 말했다.
“대장 동무, 저 동무를 살려 데려가면 그간의 동선을 전부 볼 텐데 그러면 우리 군당이 또 문책당할 거 아닙니까?” 군당 간부가 부하의 얘기에 귀가 번쩍 띄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용은의 포승줄을 풀어주라고 부하에게 신호를 주었다. 곧 용은의 손이 자유로워졌다. 그 사이 용은이 붙잡혔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제가 잘못을 했으면 제 손을 묶어 데려가십시오. 저는 정읍법원에 가서 당당하게 재판받겠습니다. 저를 인민 위원회 재판을 받게 해 주십시오. 공평한 인민 위원회라 들었습니다.”
그들이 당황했다. 마을 사람들도 용은의 온 가족이 죽은 마당에 그 집 큰아들 용은마저 죽인다면 온 동네에 소문이 날 텐데 그것을 두려워한 모양이다. 결국엔 용은을 풀어줬다. 다시는 예수를 믿지 말라는 어이없는 훈계를 해대며 말이다. 용은은 그날 이후 자신의 순교를 대신한 어머니와 두암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정신을 놓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두암교회 학살 사건의 순교자 주검을 용은의 여동생 용례와 남편 서명선 목사가 수습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김용은 목사는 가해 주동자가 한 마을 사람들이었기에 그 끔찍함을 견딜 수 없어 고향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용서는 분개함을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가해자가 저지른 해악에 대해 복수하지 않는 영적이고 초월적인 과정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김용은 목사는 군산중동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 앞에서 매일 간구하면서 영적이고 초월적인 응답, 용서하라는 인침을 받았다.
1954년 봄, 극소수의 공비 잔당들이 지리산 등에서 최후 발악을 하고 있었으나, 김용은 목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해자와 가해자 가족을 만나 용서했다. 가해자 세 명은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됐다. 그리고 김용은 목사는 가해자 가족 가운데 홀로된 여인들을 돕기 위해 다비다회를 조직해 어머니를 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평생 돌봤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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