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친정 올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 97세, 그 나이까지 혼자 사시며 식사와 함께 정갈한 삶을 이어가셨는데 가벼운 감기로 시작해서 닷새 만에 소천하셨다고 한다. 속칭 9988의 삶을 사신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연세까지 혼자 건강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시다가 겨우 닷새여 간 아프시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얼마나 복된 삶인가,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주변인의 죽음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 덧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갑자기 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 슬픔에 젖은 가족들, 무엇보다 내 나이가 이제는 죽음과 친근해져야 할 지점에 도달해 있다. 죽음은 경험해 볼 수 없으므로 관념의 문제라고 단언한 사람들의 말도 이해 못 할 바 아니지만 그러기에 더 깊이 사유하며 배워야 하질 않겠는가.

미국 영국 호주 일본등의 나라에서는 학교 정규 교육에 죽음 관련 교육을 이미 편성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죽음’에 대한 각자의 속내를 털어놓는 곳도 있다. 이름하여 데스카페,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될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2011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래, 현재도 성황 중이라고 한다.

영국에는 성인은 물론 아이들도 함께 죽음에 관해 토론하고 생각해보는 죽음 알림주간이 있다. 죽음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하는 것이다. 죽음 준비에 관한 대화와 임종 과정과 생애 말기에 대한 돌봄, 상실과 애도 장례 계획, 사전 연명의료에 대한 계획 등 다양한 방향의 죽음에 대한 사유가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시간은 죽음이 생의 자연스러운 한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죽음의 질을 조사한 적 있는데 영국이 세계 1위였다.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에 재산이나 명예 혹은 권력에 대해 숙고할 것인가. 아니면 나눔일지 사랑에 집중할 것인가. 답은 자명하다.

아름다운 도서관을 지었던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이가 들고 늙을수록 철학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략)밝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죽음과 마주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이끼루(살다)’라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가 있다. 말기암에 걸린 구청 공무원이 죽기 전 방치됐던 민원서류 중 하나를 찾아내 성사시키는 이야기다. 자신이 할 수 있떤 일중 가장 이타적인 행위. 그는 빈 공원 의자에 앉아 석양을 바라본다. “저녁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모르고 30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이젠 시간이 없구나”

수년 전 큰오빠가 어느 하루 세상을 하직했을 때 그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근조 큰오빠>에 대한 글을 쓴 것이 이 년이 지난 후였다. 지금은 고통당하는 시간보다 짧고 투명한 하직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가끔 차 안에서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오빠 남는 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서운한 일이지만 오빠를 위해서는 잘하신 일이야.” 언니가 그리울 때는 “언니, 거기서 지금 잘살고 있는 거지? 왜 그리 빨리 갔어, 지금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독백은 진실하면서도 슬픈 이야기.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가장 책이 안 팔리는 때가 가을이라고도 한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만든 때는 종이가 없던 시절, 책을 만들려면 죽간이 있어야 했고 가을이 되어서야 대나무 수확을 할 수 있었으니 가을이 책을 읽기에 좋은 시절이 되었을 거라는 추론을 하곤 한다. 그러나 책만이 독서랴.

누군가 삶은 죽음을 향한 끝없는 시도라고,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다. 가로수 이파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색을 덧입는다. 사라지기 위하여 가장 화려한 색으로 변해가는 나무들은 이 가을에도 여전히 우리의 스승이다. 가을은 죽음을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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